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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오소리 작전 - 사건정리

by 시큐 2021.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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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8월 인천 실미도에 위치한 대한민국 공군 684부대 북파공작원들이 부대원들을 살해라고 시외버스를 탈취, 청와대로 향해 돌진하다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본사 앞에서 자폭한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당시에는 '난동 사건'이라고 칭해졌지만 추후 영화 '실미도' 및 여러 방송을 통해 이 사건이 왜 일어나게 됐는지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다.

 

1.21사건

북한에서 박정희 대통령 암살의 목적으로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공작원 31명을 남한으로 침투시켰다. 이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중 29명은 사망, 1명은 생포(김신조), 1명은 확인이 되지 않았다. 당시 생포된 김신조는 인터뷰에서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말해 온 국민을 경악 시켰다.

 

오소리 작전

1.21사건 이후 이 사실에 분노한 정부는 김일성 암살 계획을 세우게 되고, 이를 위해 육군, 공군, 해군에 1개씩 특수부대를 창설하게 되고, 이 중 684부대가 공군에 창설된 것이다. 이들은 전과자와 민간인으로 구성되었는데 임무 달성 시 사형 취소, 잔형 면제 등의 혜택을 받고 임무에 실패할 경우 자폭을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실전에 가까운 훈련

이들의 훈련은 혹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훈련 중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으며, 너무 힘든 훈련을 이겨내지 못한 훈련병 중 일부는 탈영해 주민을 인질로 잡고 성폭행하는 일을 저지르기도 했다. 물론 이들은 부대 내에서 즉결 처분을 당했다. 전시가 아닌 훈련 상황에서 즉결 처분을 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이들의 훈련이 얼마나 혹독했을지 알 수 있다.

 

상황의 변화

남북 적십자 회담을 기점으로 남북 간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이 시기 중앙 정보부장이 교체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변화하며 김일성 암살 계획은 점점 잊히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 속 부대 예산을 착복하는 비리가 발생하고 부대원들의 봉급이 끊기고, 배식이 부실해지는 등 부대 관리가 소홀해지기 시작했다.

 

사살 명령

초기 부대를 창설했던 간부들은 대부분 교체가 되고 조교들 또한 교체됐다. 이런 상황 속 훈련병들은 점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부대 간부는 보안 유지를 위해 훈련병들을 몰살 시키자는 계획을 세웠고 이를 눈치챈 훈련병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담판을 짓기로 마음을 먹는다.

 

탈주

결국 훈련병들은 기간병들을 반란을 일으키고 섬을 장악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기간 병력들이 사망했고 6명의 생존자가 있다. 생존자들은 화장실 속이나 숲에 숨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 과정에서 훈련병 1명도 사망했다고 한다.

 

교전

이어 육지로 상륙한 훈련병들은 수원 인천을 오가는 시외버스를 탈취한다. 이 버스를 타고 경인국도를 타고 부평, 부천, 영등포를 거쳐 청와대를 향한다. 훈련병들은 대방동(유한양행 본사 건물) 앞까지 도달했지만 군대에 의해 저지 당한다. 이후 군과 훈련병들은 총격전을 벌였고 훈련병들의 상황은 점점 불리해져갔다.

 

최후

상황이 불리해진 훈련병들은 포위망을 돌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수류탄을 이용 버스 안에서 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자살 과정에서 4명은 죽지 않고 군에 의해 생포되게 된다. 이들은 군법 재판에 회부되어 결국 총살되어 생을 마감하게 된다. 장례조차 치러주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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